궁남지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13-06-18 15:42:44         조회 - 810

 

사적 제135호. 지정면적 45,527㎡.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別宮)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몇 개의 초석이 남아 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가 있으나 초라하고 퇴락하여 옛모습을 잃었다.

연못 동쪽에는 초석과 기와조각이 산재하여 별궁의 건물터로 추정된다. 인근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수십년 전만 하여도 3만여평이나 되는 광대한 연못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축조 당시에는 상당한 규모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한 이후 이 연못은 크게 황폐화되어 물가의 수심이 얕은 부분부터 점차 농지로 이용되어 오늘날에는 1만평도 채 못되는 수면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무왕조에 의하면,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여 주위 물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물 속에 섬을 쌓아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시켰다.”고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 못 속의 섬이 어떤 생김새로 꾸며져 있었는지 오늘날에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하는 물가는 현재의 유적을 살펴볼 때,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곡선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 연못은 자연형의 곡지(曲池)였던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섬은 30여년 전에도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어서 주변 주민들이 이것을 뜬섬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며, 그 주변으로부터는 토기와 기와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었다. 이 섬이 바로 방장선산을 모방했다고 하는 섬으로 판단된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 한가운데에 신선이 사는 세 개의 섬, 즉 봉래(蓬萊)·방장·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속에 세 개의 섬을 꾸며 불로장수를 희원했다고 하는데, 궁남지의 방장선산은 이것을 본뜬 것으로서, 이러한 꾸밈새의 정원을 신선정원(神仙庭苑)이라고 부른다.

궁남지의 동편에는 화지산(花枝山)이라는 낮은 산이 있다. 그 서쪽 기슭, 즉 궁남지로 면하는 완만한 경사지에는 대리석으로 바닥으로부터 팔각형으로 쌓아올린 우물이 남아 있고, 그 주위 일대에는 많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

이 자리는 백제의 사비정궁(泗沘正宮)의 남쪽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이궁(離宮)터로 추정된다. 이것으로 보아 궁남지는 이궁의 궁원지(宮苑池)로 꾸며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우리 나라의 궁원지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2 무왕조에는 궁남지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실려 있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으로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지변(南池邊)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이 설화는 무왕의 출생동기를 미화하기 위해 지어낸 것으로 보이나, 지금도 이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이 못을 마래못 또는 마래방죽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의 마는 마감자, 즉 서여(薯蕷)를 가리키는 말로서 무왕의 아명 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명칭이다.

이 연못은 백제의 조경수준을 엿볼 수 있는 사적으로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궁남지 [宮南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궁남지 [宮南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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